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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명유래] 감만동 솔개 해수욕장

에움길 발행일 : 20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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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개 해수욕장

지금은 잊혀 버린 부산의 매우 유명한 해수욕장이 있었다. 이름은 솔개 해수욕장이다. 한 때 편의시설이나 유명도에 있어서 송도만큼은 아니었지만 지역 주민들에게는 송도보다 훨씬 사랑받는 곳이었다. 송도해수욕장이 6-80년대 부산을 주름잡는 해수욕장이었다면, 솔개 해수욕장은 수많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곳이었다. 최근 들어 해운대 해수욕장이 여름이 되면 불반사람반이라고 하지만 60년대 솔개해수욕장은 이보다 더했다.

 

솔개는 새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솔개는 소나무를 말한다. 위치는 현재의 감만현대아파트 앞의 현대오일뱅크와 바로 앞의 GS칼텍스 자리로 보인다. 이곳에 살지 않아 모르지만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증언과 현재의 솔개 자른 지명이 이곳에 솔개해수욕장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감만동의 모래꾸지와 용당이 시작되는 돌산 사이에 솔개해수욕장이 있었다.

 

솔개해수욕장 화약고 앞 바닷가에는 용당과 감만동의 경계를 이루는 큰골까지 소나무가 많아서 솔포(송포) 또는 솔개해수욕장이라 했는데 현재는 호남정유가 들어서 있다.
옛날 솔개 해수욕장 부근에 7세대가 살았으며 바다에는 백합조개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옛날의 바닷가와 수려하던 소나무들이 어우러져 그려내던 정취는 이제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마을의 가게명에서 당시의 솔개를 확인할 따름이다.

출처 :「남구의민속과문화」- 부산남구민속회(2001년)

 

솔개라는 명칭도 이제 몇 남지 남았다. 솔개다리가 남아 있고, 솔개슈퍼는 수년 전에 문을 닫고 간판만 남아 있다. 솔개 주차장동 있으나 폐업한 것 같다.

 

1951년 감만 모래꾸찌

 

동일한 사진으로 보인다. '구찌'는 일본말로 입구다. 즉 모래가 많은 마을입구란 뜻이다. 감만부두 자리는 그 어떤 곳보다 모래가 많았다. 모래가 평탄하여 해수욕장으로서 최고의 자리였다. 하지만 이곳에 감만부두라 들어서면서 매립이 되어 황폐한 곳으로 변해 버렸다. 증언자에 따르면 솔개 해수욕장은 길이가 무려 600m 정도 이른다고 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백사장은 개발이란 명목아래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위와 동일한 사진이다.

 

 

아래의 글은 부산남구 신문에 올린 박일호 님의 회고문이다.

 

감만동 집에서 2㎞ 정도 산능선 고개를 넘으면 모래구찌가 나오고 그 주변으로 조그마하고 깨끗한 솔개해수욕장이 있었다. 나는 다섯 살 무렵 모래구찌에서 수영을 배웠다. 6·25전쟁이 끝나고 얼마 안됐을 때였다. 이제 겨우 허리까지 오는 바다 물속을 퐁당거리거나 손 짚고 수영을 할 때다. 그때만 해도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라 또래 동무들의 나이도 다섯 살에서 일곱 살 정도였고 나처럼 다들 수영은 하지 못했다. 어느 날 작은 형의 친구들이 우리 또래 다섯 명에게 작은 고깃배에 타라고 했다.

"너희들도 작은 배에 타고 가서 형들이 배에서 낚시하는 걸 구경하면 재미있을 거야."

우리는 모두 잘 되었다고 생각하면서 신나게 배에 올랐다.선창으로부터 어느 정도 나오자 수심이 깊고 파도에 배가 출렁거렸고 형들은 낚시를 시작했다. 당기는 낚시 줄에 도다리나 도미 새끼 등이 잡혀 올라왔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서 형들은 우리들의 팔, 다리를 잡아 팽개치듯 사정없이 바닷속으로 집어던졌다. 나는 이제 바다에 빠져 죽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에 정신없이 내려가다가 본능적으로 손짓, 발짓으로 헤엄 쳤고 바닷물을 두어 바가지 마신 뒤 수면 위로 올라왔다. 짠 바닷물을 마신 친구들은 죽겠다며 살려 달라 소리치고 있었다. 그런데 배에 탄 형들은 노를 저어 내뺀 뒤 저 멀리서 우리들을 향해 빨리 오라고 소리 질렸다.

우리 다섯 명은 죽기 살기로 배를 향해서 손짓, 발짓하며 나아갔다. 10m 쯤 배에 가까이 다가가자 작은 배는 10m 정도 가버렸다. 살아 있는 것이 다행이라 다시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기 시작했고 끝내 형들이 배위로 우리들을 올려 주었다. 세 명은 비실비실 쓰러지고 두 명은 구토를 하며 넘어지긴 했지만 무사히(?) 선창가에 도착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 후부터는 저절로 수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배영, 자유형 등을 배웠다.

세월이 지나 뒤돌아보니, 그 때는 얼떨결에 `잃을 게 없어 두려운 게 없던 시절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여하튼 그 사건으로 인해 바닷물에 대한 두려움은 어느 정도 극복되었다. 지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말이다. 여름이면 친구나 가족들과 함께 모래구찌로 가서 게나 조개를 잡거나 아니면 솔개해수욕장에서 수영을 즐겼다. 솔개해수욕장은 지금 호남정유가 들어서 있는 곳이 중심이었다.

옛날에는 용당동과 감만동의 경계를 이루는 큰골까지 소나무가 많아 솔포(송포)로도 불렸다. 그 많던 소나무는 현재 거의 볼 수 없다. 솔개해수욕장 인근에 토산과 용당동 석산이 있어 그 석산을 발파하여 부산항 방파제 축조와 항만 시설에 사용했다. 

감만동에는 솔개해수욕장과 함께 모래구찌의 풍경을 잊을 수 없다. 모래구찌라는 지명은 일제강점기에 `모래가 많은 바닷가 입구'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구찌(口)'는 입구를 뜻하는 일본어이다. 필자가 어릴 때만 해도 솔개와 모래구찌를 잇는 600미터 정도 길이에 폭이 20미터 정도의 경치가 아름다운 백사장이 있었다. 물이 맑아 많은 시민들이 그곳에서 해수욕을 즐겼다.

모래구찌에는 선착장이 있어 어선이 많았고 싱싱한 고기가 많이 잡혔다. 덕분에 인근 주민들은 생선을 값싸고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부산의 이름난 횟집들도 여러 장사를 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 부산항만 확장사업의 일환으로 일대 해안을 모두 매립해 부두가 축조되고 항만 도로가 재정비되면서 아름다운 백사장을 간직한 모래구찌와 솔개해수욕장은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더불어 고기잡이배들도 그에 따른 어촌 풍경도 모조리 휘발되어 버렸다. `벽해상전'의 도도한 흐름을 막을 길이 있었으랴 만은 회색 콘크리트가 추억을 덮어버렸다 생각하니 늘 가슴이 한 구석이 저민다.

박일호 전 대연정보고(현 부산세무고) 교장

출처 오륙도 행복 칼럼 <감만동 솔개해수욕장과 모래구찌의 추억>

 

솔개해수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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