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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 개항가도]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에움길 발행일 : 2023-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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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 그는 누구인가?

 

안용복(安龍福)은 동래부 출신으로 동래 수군으로 들어가 능로군으로 복무했다. 그는 부산에 있던 왜관에 들어가 일본인들과 자주 만나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할 줄 알았다. 독도 근처에서 불법으로 어업 하던 일본 어부들에게 납치되어 일본에 끌려가 당시 에도 막부를 만나 울릉도는 조선의 땅이라 주장한다. 그는 막부에게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이하는 서계를 받아 돌아온다. 하지만 송환 도중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긴다. 조선에 들어가자 멍청한 조선관리들은 왜에서 돌아온 안용복 일행에게 곤장을 때렸다.

 

대마도주는 울릉도를 자신들의 차지로 만들기 위해 조정에 다케시마(죽도)에서 조선 어민의 어채를 금지해 달라는 막부의 서계를 위조해 보낸다. 하지만 조선은 다잇 갑술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쥐게 되고 대일 강격책으로 바뀌게 된다. 공도를 관리하던 삼척 첨사를 울릉도에 파견하여 조사하게 한다. 그는 대마도에 울릉도와 독도는 조선의 영토이며 일본이 남의 영토에 침범했다는 것을 알리고 책망의 서계를 보낸다.

 

안용복은 자발적으로 두 번째 왜에 건너가 10여 며의 조선 어민과 함께 울릉도에 가서 어로 중이던 일본 어민을 송도(독도)까지 추격하며 문책한다. 시네마현으로 가서 일본 어민이 조선 바다에 들어왔음을 책망한다. 또한 막부에 대마도주의 죄상을 고발하는 문서를 전달하기에 이른다. 숙종 24년(1698년) 조선은 왜로부터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땅임을 인정받고 일본인들의 어로를 금지시킨다.

 

안용복 기념 부산포 개항 문화관

 

안용복의 출생지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부산 좌자천 1리 14통 3호에서 태어났다고 설이 있다.(현재의 동구 좌천동) 다른 하나는 동래군에서 태어났다는 설이 있다. 동래보다는 좌천동설이 더 유력하다. 동구에서는 안용복의 고향이 좌천동에 있다는 것을 기념하여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을 만들었다. 이곳에는 안용복의 업적뿐 아니라 부산항 개항에 대한 다른 이야기도 남겨 있다.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안용복 장군을 기리는 사당은 수영구 수영동의 수영사적고원 내에 따로 마련되어 있다. 안타깝게 수영사적공원에는 사당만 있을 뿐 별다른 해설문이나 설명이 일절 없다.

 

수영사적공원 안용복 동상
안용복 장군 사당에 있는 동상

 

수영사적공원에 있는 유일한 설명문

 

문화관 안으로 들어가면 안용복 장군이 일본 막무에서 얻어는 서계 문서를 쉽게 볼 수 있도록 중요한 부분을 발췌해 보여주고 있다.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고종은 1900년 10월 25일 칙령을 반포하여 울릉도를 울른군으로 승격하고, 죽도, 석도를 관장하는 행정기관으로 삼는다. 당시 반포된 칙령 내용에는 울릉도 군수가 관할하는 지역에 지금의 독소인 석도가 분명히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럼에 이번 윤석열 정부와 국민의힘은 일부러 독도를 우리 땅이라고 주장하여 일본을 기분 나쁘게 할 필요가 있느냐고 따지고 있다.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일본은 조선의 침략하면서 독도를 시네마현으로 강제편입시키고, 1906년에는 독도에 시찰단 40여 명을 보내 주인 없는 땅이라고 우기며 독도를 접수한다. 이러한 일본의 편을 드는 국민의 힘을 보고 있으면 울분이 나서 참을 수가 없다.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문화관 건너편에 안용복 도일선전시관이 있다. 이곳에는 당시 조선 수군들이 입었던 의복과 조선선박의 형태들이 그려져 있다.

 

안용복기념 부산포개항문화관

 

앞에는 당시 조선 어부들이 사용한 배 모형이 만들어져 전시되어 있다. 이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앞에 부산에서 독립운동의  발원지요 큰 세력이었던 부산진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앞에 보이는 거대한 건축물은 촤천동의 매축지 마을에 세워진 두산위브이다. 부산 매축지 마을은 일제가 대동아 전쟁을 일으키면서 조선의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을 징용하여 일본과 다른 곳으로 끌고 가기 전 숙소로 사용했던 곳이다. 이렇게 보면 동구는 일본과 많은 부분 연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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